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 영화 리뷰 (정체성, 성장, 진그레이)
마블 영화에 슬슬 지쳐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 나오는 작품들이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들었고, 저도 반쯤 의심하면서 극장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그 의심을 꽤 깔끔하게 깨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랜차이즈 후속편은 전편보다 못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번 편은 오히려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완성도를 보여줬습니다. (스포O)
영화 정체성 : 의심하고 들어갔다가 설득당한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마블 영화가 인피니티 워 이후로 전성기를 지났다는 이야기는 영화 팬들 사이에서 꽤 오래된 공통 인식입니다. 실제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개봉한 작품 중 진심으로 극장에서 몰입했던 기억이 손에 꼽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스파이더맨도 반쯤 의무감으로 보러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오프닝 몽타주 시퀀스(sequence)란 영화 초반에 여러 장면을 빠르게 이어 붙여 보여주는 편집 방식을 뜻합니다. 이 장면에서 스파이더맨이 각종 악당들을 상대하는 포즈들이 코믹북 표지를 그대로 재현한 구도로 펼쳐졌는데, 팬이 아니어도 에너지가 느껴질 만큼 잘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한 팬서비스를 넘어서 완성도 자체가 높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슈퍼히어로 영화의 클라이맥스(climax)란 이야기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을 말하며, 보통 대규모 전투 장면으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좁은 방 안에서 두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정적인 대화로 채우는 건 꽤 위험한 선택인데, 영화는 그걸 설득력 있게 해냈습니다. 드라마가 성공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닌자 클랜 핸드(Hand)와의 전투 장면이었습니다. 좌우는 좁고 위로는 뻥 뚫린 직사각형 구조의 실내 공간에서, 붉은 복장을 한 닌자들이 솟구치고 쌍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펼쳐집니다. 배경은 무채색으로 완전히 비워두고 인물들의 색채만 강렬하게 살린 미술 설계가 눈에 띄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그 광경을 보면서 "멋있다"고 혼잣말하는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도 딱 그 감정이었습니다.
스파이더맨 성장 : 피터 파커가 어른이 된다는 것
제가 예전에 봤던 스파이더맨은 소년미가 넘치고 좌충우돌하는 캐릭터였습니다. 그게 스파이더맨 특유의 매력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 편에서 피터 파커는 달라 보였습니다. 의젓함을 넘어서 약간은 지쳐 보이는, 책임감에 눌린 어른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초반 내내 피터는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며 취미도 없고, 친구들과도 멀어진 채 일과 집만 반복하는 생활을 보입니다.
이 모습이 공감이 됐습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 날 문득 '나는 요즘 뭘 하며 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오잖습니까. 일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 자신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는 그 허무함. 영화는 그걸 기억 상실 모티브로 시각화했습니다. 피터를 아는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자신이 지워진 상황은, 사회적 관계망이 끊긴 채 역할만 남은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처럼 읽혔습니다.
성장 서사(coming-of-age narrative)란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중심에 두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처음부터 이 틀을 유지해왔고, 이번 편은 그 연장선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발을 내디딘 청년'의 정체성 혼란을 다룹니다. 친구 네드와 MJ는 보스턴 MIT에서 새 출발을 했는데, 피터는 그 흐름에서 혼자 빠져나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부분이 마음이 좀 짠했습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다른 슈퍼히어로물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능력이 아니라 성격으로 사랑받는 히어로다. 아이를 구하고 나서 반드시 "다친 데 없니?"를 묻는 캐릭터는 스파이더맨 말고는 없습니다.
- 어두운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배트맨은 어둠 속에서 빛나지만, 피터 파커는 선함 속에서 빛납니다. 이번 편도 빌런조차 죽이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 관객과 가장 비슷한 나이와 고민을 가진 히어로다. 학교, 첫사랑, 진로, 직장 초년기까지 시리즈가 쌓일수록 관객의 성장과 함께 걷는 느낌이 납니다.
진그레이가 남긴 것과 마지막 장면의 여운
이번 편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진 그레이(Jean Grey)는 X맨 시리즈에서 오랫동안 핵심 캐릭터로 활동해온 인물입니다. 텔레파시(telepathy)란 타인의 생각을 직접 읽거나 조종하는 능력을 뜻하며, 빙의(憑依)란 타인의 몸이나 의식에 침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 그레이는 이 두 능력을 동시에 구사하는데,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순식간에 대상을 장악하는 장면은 시각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웠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던 대사가 있습니다. 헐크가 피터에게 한 말, "나쁜 것과 좋은 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영화는 피터가 자신의 거미 형질을 억제하려 할 때 이 질문을 던집니다. 나쁘다고 생각한 부분을 제거하면 더 나은 내가 될 거라는 생각, 사실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나쁜 부분이 제거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입니다.
세계 최대 영화 데이터베이스인 IMDb에서도 이번 편의 드라마 완성도에 대한 호평이 상당합니다. 단순한 슈퍼히어로 액션물이 아니라 정체성을 다루는 진지한 이야기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제 감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복면을 벗은 피터가 병원 앞 군중 속에 섞여 자신의 병실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퍼니셔(Punisher)가 스파이더맨 흉내를 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그 표정은, 슈퍼히어로로서의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피터 파커로서의 그가 처음으로 웃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마지막에 피터와 네드가 손인사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 진 그레이가 MJ의 머릿속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고 명확히 말한 만큼, 네드도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닐 것입니다. 몸이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영화가 명확히 말해주지 않아서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진 그레이는 나중에 다시 나왔으면 합니다. 강해진 버전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증을 충분히 남겼거든요.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란 마블 스튜디오가 구축한 공유 세계관(shared universe)을 뜻하며, 여러 히어로들이 같은 세계 안에서 연결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이번 편은 그 안에서 X맨 세계관을 스파이더맨과 접목하는 첫 번째 본격 시도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피터 파커를 돌연변이(mutant)로 바라보는 시각을 영화가 자연스럽게 심어준 방식은, 두 세계관이 억지로 붙여진 느낌 없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해줬습니다. 마블 공식 사이트에서도 이번 편이 새로운 트릴로지의 시작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보려면 이전 편을 다 봐야 하나요?
A. 일반적으로 MCU 영화는 전편을 모두 봐야 이해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번 편은 노 웨이 홈 정도만 보고 가도 내용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회상 장면과 대사를 통해 맥락을 자연스럽게 보충해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노 웨이 홈의 기억 상실 결말을 알고 가는 것이 감정 몰입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Q. 진그레이는 빌런인가요, 아닌가요?
A. 보는 내내 빌런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에서 스파이더맨을 도우며 끝납니다. 영화는 진 그레이를 단순한 악당으로 설정하지 않고, 피터 파커와 정반대 방식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로 그립니다. 나중 편에서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느껴졌고, 강해진 버전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됩니다.
Q. X맨 세계관을 몰라도 영화가 이해되나요?
A. 저도 X맨 시리즈를 전부 보지는 않았는데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진 그레이의 능력과 배경은 영화 안에서 충분히 설명해주고, X맨 세계관의 핵심 테마인 '돌연변이 차별' 문제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보여줍니다.
Q. 액션이 부족하다는 평도 있던데, 실제로 어떻게 느끼셨나요?
A. 노 웨이 홈처럼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나오는 규모와 비교하면 확실히 액션 스케일은 작습니다. 일반적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는 액션이 클수록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번 편은 오히려 규모를 줄인 덕분에 인물 내면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닌자 클랜과의 실내 전투 장면만으로도 시각적 만족도는 충분했습니다.
마블 영화에 피로감을 느끼던 분이라면 이번 편은 한 번 믿어볼 만합니다. 대규모 전투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따라가는 이야기에 집중한 선택이 결국 영화를 살렸습니다. 노 웨이 홈을 보고 갔다가 뭔가 아쉬웠던 분들이라면, 이번 편에서 그 감정의 연장선을 제대로 마무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뉴 유니버스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보지 않으셨다면, 이번 편 이후에 꼭 챙겨 보시길 권합니다. 완성도 면에서 실사 시리즈 못지않게 놀라운 작품들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_NmzLX2bGU4